뉴욕  예일  장로교회 | Yale Korean Presbyterian Church of New York

두 갈래 길

등산을 하다보면 한 길로 한참 가다가 어느 순간에 길이 둘로 갈라지는 경우를 만납니다. 만약 아는 길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전에 갔던 길로 가겠지만 처음 가는 초행길에 두 갈래 길을 만나면 주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어느 길을 가야 헤매지 않고 내가 원했던 목표 지점에 닿을 수 있냐하는 고민을 하게 되는 거지요. 등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나무에 리본이나 혹은 어떤 표시가 되어 있는지를 찾게 될 것입니다. 등산을 자주 다니시는 분들은 표시된 마크를 찾는 일이 어렵지 않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마크가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여정도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 이하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고 했습니다. 넓은 길이 있고 좁은 길이 있다는 거지요. 걷기 쉽고 길이 쉬워 보이고 많은 사람들이 가는 넓은 길, Broad way 가 있는데 이 길의 종국은 멸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좁은 길로 가라고 하십니다. 길이 좁고 쉽게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며 이 길을 걷는 사람이 적다하더라도 그 끝은 생명이라고 기꺼이 좁은 길로 가라고 하십니다.

구약 성경에도 이와 같이 두 갈래 길을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잘 대조해 놓고 있습니다. 열왕기 서를 읽다 보면 딱 두 가지 타입의 신앙의 길이 나옵니다. 하나는 여로보암의 길이며 다른 하나는 다윗의 길입니다. 특별히 분열 왕국 시대로 들어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왕들의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는 열왕기 서는 여로보암이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이후 그의 죄가 계속 시대를 따라 흘러 내려가면서 북 왕국 각 왕들에게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도 처음에는 부지런한 청년이며 큰 용사였습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이 그를 요셉 족속의 일을 감독하게 했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이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행치 아니함으로 하나님이 여로보암에게 열 지파를 주어서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셨다고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여로보암에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만일 여로보암이 하나님께서 명령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그 길로 행하며 하나님 눈에 합당한 일을 하고 다윗이 행함 같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여로보암과 함께 있어 다윗을 세운 것 같이 여로보암을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주리라고 열왕기 상 11장 38절에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러 올라가면 그 백성의 마음이 르호보암 왕에게 돌아갈까 봐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 금송아지 우상이 이스라엘백성들을 애굽에서 구하여 낸 신이라 하며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하도록 만들고 또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제사장과 절기를 세우고 분향했습니다. 여로보암은 인간적인 자기 생각으로 모든 일들을 계산하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다윗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자기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며 하나님 앞에 정직한 자로 서려고 노력했습니다. 북 이스라엘 대부분의 왕들이 죽고 새로운 왕이 들어 설 때마다 성경은 각 왕의 행적을 여로보암의 길로 갔다든지 혹은 여로보암의 죄를 따랐다고 결론짓고 있습니다. 더 없이 찬란했던 시대의 솔로몬 왕도 처음에는 정말 겸손히 시작했다가 후에는 퇴색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솔로몬 왕이 초기에는 지혜로운 왕으로 성전도 짓고 좋은 일도 많이 했지만 후에 후궁 칠백 명에 첩 삼백 명을 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신들을 따르게 된다고 통혼하지 말라 했지만 솔로몬 왕은 그 많은 여인들을 왕의 여자로 만들면서 이방 여인들이 섬기던 각종 신들이 함께 들어오게 되자 산당을 짓게 하고 제사를 드리도록 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열왕기 상 11장 6절은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같이 따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과 율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아 나라를 신하였던 여로보암에게 준다고 했습니다. 여로보암도 얼마든지 바르게 갈 수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방향으로 결정하고 그 길로 행했습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나쁜 쪽을 택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세토록 여로보암의 길, 곧 죄 된 멸망의 길을 대표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 보여 지는 두 갈래 길, 여로보암의 길이냐 다윗의 길이냐 하는 갈림길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길이 어느 쪽이어야 하는가를 역사는 말해주고 있고 또 우리들에게 도전을 줍니다.

 

시대가 바뀐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두 가지 노선입니다. 악한 길이냐 선한 길이냐, 혹은 여로보암의 길이냐 다윗의 길이냐, 넓은 길이냐 좁은 길이냐 하는 갈림길에 우리들은 서 있습니다. 죄악 된 길의 속성은 그 길이 쉬워 보인다는 것, 재미가 있어 보인다는 것,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시시때때로 두 갈림 길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일이 많습니다. 신앙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간단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이냐 아니면 불순종이냐 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이 기준이 되어 따지고 계산한다면 절대로 좁은 길로 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먼저 간 신앙의 선배들이 마치 등산로에 마크를 해 둔 것같이 좁은 길로 가라고 해도 우리들은 내 생각대로 눈에 보이는 좋은 길, 편한 길, 대다수가 가는 길을 선택하며 이것이 이 시대에 적절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현상이 우리 시대와 사회 저변에 쫙 깔려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두 갈래 길을 만날지 모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길을 우리는 선택해야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고 우리 가족 모두가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선택하고 그 길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