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눅 19:28~40
제목: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종려주일입니다. 사복음서에서 공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유독 누가복음에서는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는 기록이 나타납니다. 종려주일을 맞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통한 세 가지 중요한 의미를 배우고자 합니다.
- 왜 나귀 주인은 순순히 나귀 새끼를 제자들에게 주었을까?
남의 나귀를 가져가는 것은 절도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나귀 임자가 허락합니다. 그것도 단 한 마디에. “주가 쓰시겠다 하라.” 궁금해서 성경을 묵상하는 중에 “베다니”라는 장소가 발견되었습니다. 베다니는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곳입니다. 결손 가정에서 아들의 죽음은 그 가정의 기둥이 뽑히는 것과 같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아마 마을 사람들도 몹시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이 온 동네에 퍼졌을 것입니다. 사랑과 존경의 관계에서는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럼 나를 죽음에서 건지신 주님께서 나에게 있는 것을 쓰시겠다 하실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 누가 쓰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집니다.
나귀 새끼는 자라나면서 짐을 싣고 사람 태우다가 늙어 죽습니다. 그러나 그 나귀 새끼는 예수님을 태우면서 스가랴 9:9의 예언을 이루는 나귀가 됩니다. 메시아의 구속을 성취하는 일에 쓰임 받은 것입니다. 오병이어도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께 드렸더니 많은 사람을 먹이고 남는 기적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주님께 쓰임 받으려면 묶인 것에서 풀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부터 풀어질 것입니까?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의 육신의 문제를 언급합니다. 우리의 육신을 영어로 “Flesh”라고 합니다.
F: Following, L: Long, E: Established, S: Self-centered, H: Habits
오랫동안 굳어져 온 자기 중심적인 습관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기심, 나태함, 교만, 정욕, 시기심, 열등감, 부정적 사고 등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무엇에서 풀어져야 주님께로 갈 수 있을까요?
- 돌들이 소리 지를 수가 있나요?
무리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왕으로 오신이여!” 하면서 외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선생(랍비)이라 부르며 제자들을 자제시키라고 합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저들이 소리 지르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박국서 2:11의 심판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무리는 시편 118:25의 말씀을 기억하며 “왕이여 이제 우리를 구원 하소서” 하면서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랍비 중의 한 사람으로 보고 불쾌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왕으로 오신 주님을 찬양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우리를 구원 하소서” 라고 기도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에 들어가게 하신 주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지 않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입니다(벧전 2:9).
우리 교회는 교회 벽돌들이 소리 지르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찬양하고, 기도하고, 선교하는 교회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