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예일  장로교회 | Yale Korean Presbyterian Church of New York

다시 아버지께로

본문:  눅 (Luke) 15:11~24

제목: 다시 아버지께로

교회는 성령 공동체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교회가 탄생하였기에 교회의 이야기는 성령의 이야기어야 합니다. 성령 강림 이전과 이후의 제자들의 모습은 확연히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했고 두려움 속에서 숨어 있던 자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문을 열고 나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담대히 증거했습니다. 성령님을 보혜사라고 부릅니다. 보혜사는 옆에서 돕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또 성령님을 상담자(Counselor)라고 부릅니다. 방황할 때 안내자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위로자(Comforter)라고 부릅니다. 상처로 낙심할 때 위로하고 힘을 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 마음으로 한 곳에 모여 성령강림을 사모하며 기도했습니다. 오순절에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 같았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과 같은 모습으로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성령강림의 현상은 조금씩 다를 수 있어도 그 본질적 내용은 같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날려 보내고, 정욕과 죄악에 물든 마음을 태우고, 주님 사랑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 사랑으로 뜨겁게 하십니다. 17개 나라에서 오순절을 지키기 위해 모여 온 사람들이 제자들이 하는 말을 그들이 태어난 곳의 언어로 듣게 되어 놀랍니다. 말은 달라도 하나님께서 하신 크신 일을 듣게 되었습니다(행 2:11). 성령의 지배를 받기 전에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말을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지배하시면 하나님의 큰일을 증거합니다. 교만은 바벨탑 사건처럼 언어를 혼잡하게 합니다(창 11장). 성령강림은 언어를 소통하게 합니다. 이 땅에서 하늘의 일을 듣게 합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늘의 능력을 증거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갖는 관심입니다.

 

또한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입니다. 양자는 양자될 사람의 자격이 아니라 양자 삼는 분의 일방적 선택에 따라 좌우됩니다. 아버지의 신분에 따라 양자의 신분이 바뀝니다(요 1:12). 아버지가 왕이면 양자는 과거의 신분에 관계없이 왕자가 됩니다. 아버지 재산의 상속자가 됩니다(17절). 아버지 집이 내 집이 되고, 아버지 재산이 내 재산이 됩니다. 아버지는 나의 기도를 들으십니다(마 7:7). 그리고 고난의 의미가 달라집니다(17절). 단순한 고생이 아니라 이제는 영광을 받기 위한 고난입니다(17절). 고난을 통해 더 다듬어지고 성숙해집니다.

 

* 그렇다면 마귀는 무엇을 하고 있었겠는가?

성령의 불 받은 사람을 불 끄러 다니지 않겠습니까? 뜨거워진 교회를 식히는 일을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 집을 떠난 둘 째 아들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본문의 핵심적인 문제를 짚어 봅니다.

먼저, 참 자유란 무엇일까요? 자유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속박에서 벗어남도 아닙니다. 그 아들은 물고기는 물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기차는 철길 위에서 자유를 누린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나무는 뿌리에서 잘리면 결국 죽게 됩니다. 인간은 우리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사랑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립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나무뿌리에서 줄기와 가지가 분리되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인간의 사랑은 그림자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림자는 해가 떠야 생깁니다. 돈이 있어야 친구도 생깁니다. 외모가 아름답고 건강해야 애인도 생깁니다. 그런데 구름만 끼면 없어집니다. 돈 떨어지면 친구도 떠납니다. 건강과 외모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면 애인도 떠납니다. 참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함이 없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처럼 아플수록 더 안타까와하며 사랑하십니다.

 

결과적으로 흉년이 들었습니다. 먹고 살기 조차 어려워졌습니다. 이러다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몰아쳐 옵니다. 갈 곳이 없었습니다. 자존심도 다 포기하고 돼지 치는 곳으로 갔습니다. 자유를 찾아 아버지 집을 뛰쳐나왔지만 오리려 이제는 정말 종이 되었습니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 조차도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 전환점

아버지 집을 기억한 것입니다. 언제? 돈이 다 떨어 졌을 때, 건강 약해졌을 때, 친구 가 떠났을 때, 자존심/자신감마저 다 무너졌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문이 닫혔을 때 아버지 집은 열려 있었습니다. 하늘은 열려 있었습니다. 아들이 아니라 종의 하나로 받아 달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완전한 아들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인생의 위대함은 어디에 있을까요?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능력을 잃어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회가 교회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실패한 자들을 위한 은혜입니다. 다시 한 마음이 되어 기도의 자리로, 성령충만의 자리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 갈 때 성도가 살고, 교회가 살고, 사회가 살아 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