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예일  장로교회 | Yale Korean Presbyterian Church of New York

예수님의 권위

막(Mark) 1: 21-31

제목: 예수님의 권위

‘권위’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어떤 분은 권위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권위를 곧 질서로 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권위라는 말을 들을 때 반감을 가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권위의 인물들로 인한 상처를 받은 적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우선 ‘권위’와 ‘권위주의’의 차이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롬 13:1).
그러므로 권위는 하나님을 대리하는 것입니다. (부모, 교사, 정치가 등). 권위주의는 권위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입니다. 섬기라고 주신 힘을 자신의 목적과 야망을 위해 잘 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왜곡된 부모상,
왜곡된 교사상, 왜곡된 정치 지도자상은 상처를 가지고 옵니다. 상처많은 사람이 부모가 되면 자기 자녀에게도 상처를 되물림해 줍니다. 상처많은 사람이 교사가 되면 학생들에게 상처를 되물림해 줍니다. 상처많은 사람이 정치인이 되면 백성들에게 상처를 되물림해 줍니다.
권위는 우산과 같습니다. 우산이 벗겨지면 우산 안에 있는 사람이 비를 맞게 됩니다. 우산은 하나님께서
씌워주십니다. 그러나 우산을 벗겨 비를 맞게하는 것은 마귀입니다. 마귀는 권위를 권위주의로 변질시켜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 적의 화살을 맞게 합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됩니다(고전 2:13).
예수님을 통해 진정한 권위를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군림하는 권위가 아니라 섬기는 권위였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외적인 허세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권위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과 치유입니다.
1. 가르치는 권위
예수님의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충만했습니다(고전 2:20). 그 안에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 강단에서, 목장에서, 교회학교에서,
제자훈련반에서 이런 권위가 있기를 바랍니다.
2. 더러운 귀신을 쫓아 내는 권위
귀신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을 더럽힙니다. (말, 생각, 행동). 예수님은 마귀의 일을 멸하러
오셨습니다. 마귀에게 고통당하는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해 오셨습니다(요일 3:8). 두 가지 문이 있습니다.
하나는 음부의 문이고 다른 하나는 천국 문입니다(마 16:18, 19). 교회는 음부의 문 닫고, 천국문 열어주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귀신은 경련을 일으키고 소리를 지르며 나갑니다(26). 이것은 마지막으로 귀신들린
자에게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회복이 있는 곳에 주변 사람들의 놀람과 찬탄이 쏟아집니다.
예수 믿는 자도 귀신들릴 수 있습니까? 예수 믿는 자에게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계신 사람을
마귀가 장악(possession)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험(influence)은 할 수 있습니다(마 16:23; 고전 7:5; 엡 4:26, 27). 마귀에게는 ‘No,’ 예수님께는 ‘Yes’해야 합니다.
3. 병을 고치시는 권위
열병으로 누워있는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고칩니다. 그의 축 늘어진 손을 잡으시고 일으키십니다. 병고침을
받은 시몬의 장모는 감사의 마음으로 성도를 섬깁니다. 문제로 인해 걱정하기 보다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예수님께 기도로 나아갑시다.
[결론]
1. 지금까지 권위에 대한 나의 이해는 예수님의 권위였습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권위주의였습니까?
2. 나는 예수님의 권위가 나의 권위가 되기 위해 어떻게 노력합니까?
3. 치유와 회복이 있는 곳에 감사와 감격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이런 감사와 감격이 있기를 기도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