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마다 히브리서를 읽으면서 계속 반복되는 주제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본체’와 ‘모형’입니다.
모형(그림자)은 이 땅의 성막이며 본체는 하늘의 성소입니다. 모형의 제물은 소와 양과 염소지만,
본체의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모형은 해마다 드려야 하지만, 본체는 단번에 드려 영원한 속죄를 이루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입니다. 모형은 돌 비석에 기록된 옛 언약이지만, 본체는 마음과 생각에 기록된 새 언약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습니다”(히 9:22). 짐승의 피가 우리 죄를 영원히 깨끗케 할 수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구태여 피를 흘리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는 그것보다 죄의 문제입니다. 죄는 하나님께 가는 길을 가로 막기 때문입니다. 죄의 결국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롬 6:23). 죄는 지우기가 무척 힘듭니다. 구약 시대에 흘린 짐승의 피의 양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배 잘 드리는 것, 봉사 많이 하는 것, 전도 많이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과정이요 도구에 불과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죄 사함 받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가 구원받는 것입니다(히 9:28).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히 10:9). 그렇게 되기 위해서 최우선 순위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단번에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신장이식 수술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 투석을 해야 살 수 있었던 사람을
친한 친구가 신장이식을 해 줘서 새 생명이 되었습니다. 엄청 고마웠을 것입니다. 그 고마움을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마움이 얼마나 갈까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세월이 흘러 갈수록 점점 그 고마움을 줄어들 수 있을 것입니다.
영국에 어느 교회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너무 귀중해서 다음과 같이 교회 현관에 썼다고
합니다. ‘We preach Christ crucified.’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이 말이 더 이상 감격이 아니라
골동품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의 담쟁이 넝쿨이 ‘crucified’라는 단어를
덮었을 때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로부터 그 교회는 ‘We preach Christ’만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정치, 철학, 도덕적 이슈만을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월이 더 흘러가면서 이제는
담쟁이 넝쿨이 ‘Christ’를 덮었을 때 그 교회도 ‘We preach’만 남았다고 합니다. 무엇을 설교하는지 모르는 설교를 하고 성도들도 그런 설교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 교회는 결국 복음을 잃어버리고
죽어가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영국뿐만 아니라 복음의 1세대인 유럽 국가 교회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오늘날 미국의 교회들도 이 모습을 닮아 가고 있습니다. 아니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21세기
후기 근대주의를 살아가는 모든 교회들의 유혹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뉴욕예일장로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We preach Christ crucified.’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