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예일  장로교회 | Yale Korean Presbyterian Church of New York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

금주 금요일인 3월 17일은 세인트 페트릭스 데이(St. Patrick’s Day)입니다. 성 패트릭(387-461)은
원래 영국 사람인데 아일랜드에 가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였습니다. 그리고 3월 17일은 그가 죽은
날입니다. 아일랜드에서는 이 날을 최대의 축제일로 여기며, 미국에서도 이민 온 아일랜드 사람들에
의해 축제 퍼레이드가 펼쳐집니다.
아일랜드에 살던 케트족(Irish Celt)은 잔인하고 야만적인 종족으로 유명했습니다. 이들은 영국을
침공하여 주민들을 잡아 노예로 부렸기에 영국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패트릭은
15살에 켈트족에 납치당해 아일랜드로 끌려갔습니다. 거기서 추장의 노예로 6년을 보내게 됩니다.
극적으로 탈출한 패트릭을 보자 그의 부모는 돌아온 탕자를 만난 아버지처럼 껴안고 울었습니다.
다시 헤어지지 말자고 부모님과 약속을 했지만 그 약속은 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꿈에 아일랜드의
한 청년이 편지를 전해주었는데, 그 안에는 “당신에게 호소하니 우리에게 돌아와 주소서”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패트릭은 이 꿈을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해야 할 사명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는 프랑스로 가서 수도원에서 성경을 연구하고 훈련을 받은 뒤 432년에 노예가 아닌 수도사 신분으로
아일랜드로 건너갑니다. 패트릭은 일생동안 300개가 넘는 수도원과 교회들을 아일랜드에 세웠습니다.
수천의 제자들을 길러냈으며 12만 명에 달하는 켈트인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패트릭과 수도사들의
노력으로 켈트족은 야만의 옷을 벗고 문명과 신앙의 예복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약탈이 줄고 오히려
약자를 돌보는 삶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노동과 독서와 기도가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결과, 중세
초 유럽에서 가장 지성적인 지역이 되었습니다.
패트릭의 메시지는 쉬우면서도 권위가 있었습니다. 들에 핀 세 잎 클로버(Shamr ock)를 가지고
삼위일체를 간결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패트릭이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추장의
아들이 병들어 누웠을 때 패트릭이 기도해서 회복되자 부족민이 전부 개종하는 역사도 나타났습니다.
패트릭은 자선 수도사로서 봇짐에는 항상 나눠줄 빵과 옷들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그와
그의 후손들이 부른 켈트 찬송에는 불굴의 신앙의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 찬송가 484장이
그것입니다.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주 없이 모든 일 헛되어라. 낮이나 밤이나 주님 생각. 잘 때나 깰 때 함께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