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21: 15~23
제목: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이 다시금 옛날 직업인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면 뭔가 부활의 능력으로 이제는 주님과 복음을 위해 힘차게 일어나야 할 것이지만 오히려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 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것은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깐 베드로는 과거에 자신이 주님을 부인한 사실이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차마 얼굴을 들기조차 부끄러웠습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그 상처를 잊기 위해 고기 잡으러 갔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시금 그들을 찾아 가셨습니다.
- 베드로의 치유
주님은 이제 복음의 사명을 제자들에게 맡기시고 승천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복음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 다는 것을 잘 아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주님의 양떼를 보살피지 못 한다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숯불을 피워놓고 생선과 떡을 주시면서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숯불 가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시려는 주님의 따뜻한 배려였습니다. 비록 주님을 따르는데 실패했지만 주님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도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이름인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네가 실패한 것은 베드로가 아니라 시몬이었어. 아직도 네 안에 남아 있는 죄성와 인간의 연약함이었단 말이야. 약점에 집중하지 말고 예수님의 사랑에 집중하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만이 베드로를 회복시키고 다시금 주님의 제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원동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데 실패하는 것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사랑이 부족해서입니다.
-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만이 보입니다.
그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목양의 기초입니다. 목사나 교사, 목자 등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가 매우 큽니다. 중국이 공산화 될 때 재산 몰수의 위협, 구타의 위협, 총살의 위협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이 이긴 것은 바로 나는 없고 사랑하는 예수님만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1947년 후 약 30년이 지난 후 중국 기독교는 지하교회에서 오히려 10배 부흥하는 능력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에 능력이 있습니다.
- 비교는 감사보다 원망하게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그의 몫이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만 바라봅시다. 주님만 사랑합시다. 우리 마음이 주님 사랑으로 가득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