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예일  장로교회 | Yale Korean Presbyterian Church of New York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행(Acts) 9: 1-19

제목: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도행전의 두 가지 큰 사건은 오순절 성령강림과 바울의 회심 사건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교회가 탄생했고, 바울의 회심으로 인해 기독교가 유대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세계적 종교로 발돋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반 이상이 바울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13-28장).

 

  1. 바울

그는 스스로 변했나? 아니면 강권적으로 붙잡혔나? 사울(바울이 되기 전의 이름)은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으로서 그는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은 자라는 말씀(신 21:23)을 믿고 예수가 메시아일 수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율법을 무시하고 모독하는 행위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열정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이 많이 모여 있다는 다메섹으로 그들을 잡으러 갑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오히려 그가 핍박한 예수 그리스도께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임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박해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는 위대한 발견을 하고 그의 서신에서 이를 거듭 밝히고 있습니다(엡 1:23; 골 1:18). 나의 나 된 것은 은혜입니다(고전 15:10).

 

그렇다면 그는 붙잡혀서 할 수 없이 수동적인 삶을 살았나 하는 질문입니다. 벌 받을까 무서워서 질질 끌려 다니는 삶을 살았나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진리를 발견하고 오히려 담대히 잡힌바 된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빌 3:12-14). 이게 신앙입니다.

 

  1. 아나니아

환상 중 사울을 위해 기도해 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상식적으로 그를 박해하기 위해 온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준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이기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은 만날 수 없던 사람을 만나게 하셔서 그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기 위해 두 사람에게 똑 같이 말씀해 주십니다. 주님의 음성을 분별하기 위해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택한 그릇’이라는 말이 눈에 띕니다. 오늘 내가 있음은 과거에 나의 삶을 통해 준비해 오신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사울은 이방인 선교를 위해 이방 나라에서 태어나게 하셨고, 임금과 고관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학문을 배우게 하셨고, 박해를 했으니 박해를 받아도 억울하지 않는 열심의 사람으로 준비해 오셨습니다. 지나간 세월을 돌아보세요. 오늘은 위한 은혜가 아니었나요?

 

  1. 신앙 공동체

아나니아는 사울을 “형제 사울아”라고 부릅니다. 표면적으로는 원수지간입니다만 주님의 시선으로 보면 형제입니다. 아나니아가 기도할 때 사울의 눈에 비늘이 벗겨졌습니다. 비늘은 내가 가지고 살아 왔던 가치관과 기준입니다. 비늘이 벗겨지고 보니 예수께서 저주받아 나무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나의 죄와 나의 허물 때문에 달리신 것입니다. 내를 낫게 해 주시기 위해 채찍에 맞으신 것이었습니다(사 53:5). 전에는 원수처럼 보였던 사람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니 예수께서 피 흘려 구속하신 형제자매입니다. 이런 눈으로 비늘이 벗겨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이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택한 그릇으로 우리 교회를 부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누구입니까? 신앙생활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사울이 바울 되는 은혜를 입은 성도 여러분! 예일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를 통해 오늘도 복음을 위한 택한 그릇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우리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성도와 교회가 아니라 그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며 주신 사명에 충성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