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예일  장로교회 | Yale Korean Presbyterian Church of New York

소외된 자에 대한 긍휼

막(Mark) 1: 40-45

제목: 소외된 자에 대한 긍휼

나병 환자는 육체적 고통, 정신적 외로움, 사회적 소외감으로 고통 속에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입니다(레 13:45-46, Masterman “Dictionary of Christ and the Gospel”).
1. 나병 환자의 믿음
1) “꿇어 엎드려 간구”: 나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주님 만이 희망입니다. (간절한 요구)
2) “원하시면”: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원합니다. 만일 원하시지 않으면 이대로 살다 죽어도 좋습니다.
2. 예수님의 반응
1) “불쌍히 여기사”: compassion(suffering together). 내장이 찢어질 듯한 아픔
2) “손을 내밀어”: 능력이 나타남의 상징입니다. 동시에 동일시의 의미가 있습니다. 말씀만으로도
하실 수 있었지만 하나님과 사람과 단절된 사람을 만지면서 연결시켜주십니다. 그 나병환자는
누군가 만져주는 손길을 느껴본 때가 언제였는가?
3)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예수님은 건강이 회복되는 것을 원하십니다.
3. 구원 그 이후의 삶
1)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 아니라 완성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제사장에게 보이라”(44절)
2)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법을 의무가 아니라 이제는 기쁨으로 감사하며
지킵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전도와 봉사).
[적용]
1. 믿음으로 주님께 간구하는 시간이 됩시다. 예수님의 손길을 느끼는 시간(능력, 사랑, 긍휼),
예수님의 회복의 은혜를 맛보는 시간(건강, 믿음, 인간관계)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2. 교회적 차원에서 적용
* 한국 교회가 사회에 칭송을 받을 때는 대표적으로 3.1운동 때 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일본 식민지
치하에서 민족의 아픔을 함께 했습니다. 교회를 민족의 소망이라고 생각했고, 교인이 된다는 것은
애국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회에 대한 세상의 눈초리가 곱지 않습니다.
*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는 영적으로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열심히 나아갑니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는 저 낮은 곳을 향하여 가는 데는 소극적입니다.
* 방주형 교회는 교회를 찾아 오게 하는 모델입니다. 그러나 21세기 후기 근대주의의 탈기독교
문화에서는 구조선 교회의 사명을 방주형 교회사명과 함께 균형있게 가져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자기와 함께 저 낮은 곳으로 가서 고통하는 사람들을 치유하자고 하십니다.
누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갈 것입니까?
3. 내가 돌아 볼 소외된 자는 누구인가?
우리 교회에는 나병환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가 없을까요?